좋은 삶을 위한 필수 요소로서의 동네

서비스 | 2025-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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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 등단 12년 차 작가. 『댓글부대』, 『한국이 싫어서』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한국 사회의 문제를 날카롭게 포착해 왔다. 사회를 예리하게 비판하는 작가이기도 하지만, 애정 어린 시선으로 동네를 들여다보는 이웃이기도 하다. 에세이 『아무튼 현수동』과 인문학 강연을 통해 동네에서 이웃들과 연결되는 것의 가치를 꾸준히 이야기해 왔다. 그에게 동네란 이웃들과 서로 의지하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다.

장강명 작가의 에세이 『아무튼 현수동』은 작가가 살고 싶은 가상의 동네 ‘현수동’을 다룬다. 그는 이 책에서 현수동의 지리적 위치, 교통, 상권까지 꽤 구체적으로 동네의 모습을 상상하는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현수동 주민들의 모습이다. 현수동 주민들은 그 안에서 이웃끼리 마주치면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다양한 주제로 모임을 갖는 등 활발하게 교류를 이어간다. 한동네에 살면서도 데면데면해진 요즘 풍경과는 사뭇 다른 상상 속의 동네 현수동. 그는 왜 이런 동네를 꿈꾸는 걸까? 

좋은 삶에는 인간관계가 필요하다 

‘아무튼 현수동’ 속 주민들은 이웃들을 자주 만나는 걸로 나오는데요. 작가님도 실제로 이웃과 교류가 많은 편이신가요?

저는 사실 엄청 내성적이라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편은 아니에요. 제가 기자였을 때 주변에서 그런 성격에 어떻게 기자를 하고 있냐고 많이 물어보기도 했을 정도로요. 혼자 있어도 별로 외로워하지도 않았어요. 내성적인 성격이 단점으로 느껴지지 않아서, 굳이 성격을 외향적으로 바꾸고 싶지도 않았고요. 30대 중반까지는 자유라는 가치를 열렬히 추구했어요. 다른 사람이랑 부대끼면 자유를 희생해야 할 때가 많잖아요. 그래서 그냥 사람들을 만나지 않는 편을 택했죠. 그러다 나이가 들면서 좋은 삶이란 뭘까 고민하면서 생각이 바뀐 거 같아요.

좋은 삶이요?

저는 과거에 좋은 삶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기자일 때는 의미 있는 기사를, 소설가일 때는 의미 있는 작품을 쓰는 걸 목표했고, 나머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선 더 다양한 의미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좋은 삶에는 역경이나 고통도 필요해요. 예를 들어 연애 경험이 없어서 실연을 한 번도 당해보지 않은 인생과 이별로 마무리됐더라도 한 번 연애 해 본 인생이 있다면, 후자가 더 좋은 삶이 아닐까 싶은 거예요.

좋든 싫든 다양한 관계를 경험해 보는 게 중요하다는 거네요. 

맞아요. 그리고 그 관계 중에서도 양적으로 풍부한 인간관계보다는 질적으로 깊은 인간관계가 더 필요할 거 같아요. 이런 경우를 생각해 봐요. 정말 친한 친구 한 명에게 큰 망신을 주고 팔로워 10만 명을 얻은 사람이 있다면, 다들 그 사람과는 친해지고 싶어 하지 않을 거예요. 이미 마음속으로는 넓고 얕은 인간관계보다, 양적으로 적어도 깊은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 정말 힘들 때 SNS에서 모르는 사람이 ‘힘내세요'라고 단 댓글 수백 개보다, 전화로 ‘힘들어 죽겠어'라고 말하면 ‘지금 어디야' 이러면서 찾아오는 친구에게 더 큰 위안을 받듯이 말이에요.

온라인보다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뜻일까요?

오프라인과 온라인 인간관계 중에서 꼭 하나만을 택해야 하는 건 아니에요. 저도 가까운 사람들과 온라인으로도 소통하고 있고, 또 온라인에선 취향이나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을 찾기가 쉽거든요. 다만 둘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매긴다면, 오프라인 인간관계가 더 중요할 거 같아요. 온라인은 아무래도 양적으로는 풍성하지만 질적으로는 빈약한 인간관계를 많이 만들어요. 온라인이 친구와의 우정, 연인과의 사랑처럼 질적으로 깊은 인간관계를 제공해 주지는 못하니까요. 

장강명 작가는 질적으로 깊게 발전할 수 있는 관계 중 하나로 동네 이웃을 꼽았다. 내 근처에 있어 언제든 쉽게 만날 수 있는 관계.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우리는 동네에서 이웃들과 자연스럽게 엮이곤 했다. 필요한 물건을 사려면 가게 주인과 얼굴을 마주해야 했고, 급한 일이 생기면 옆집 이웃의 도움에 의지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알리고 싶지 않은 내 사정들까지 속속들이 알게 돼 피곤해지는 경우도 자주 생겼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부담스러운 관계를 피해, 서로의 삶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얻은 자유로움이 더 나은 삶이 아니겠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동네에서 이웃과 만나야 하는 이유는 뭘까?

책임감을 나누는 곳, 동네 커뮤니티

과거랑 지금이랑 확실히 이웃 관계의 양상이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지금은 대부분의 인간관계를 선택할 수 있지만, 과거엔 원치 않더라도 이웃들과 계속 교류할 수밖에 없었죠.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휴대폰이 없었는데요. 부모님이 저한테 얘기를 못 하고 집을 비우면 옆집에 열쇠를 맡겼어요. 집에 왔는데 문이 잠겨 있으면 양쪽 옆집 문을 두드리고 열쇠를 받았죠. 옆집에서 과자를 먹으면서 부모님을 기다릴 때도 있었고요. 저희 어머니와 옆집 아주머니는 아무리 싫더라도 관계를 이어 나가야만 했어요.

지금은 굉장히 낯선 풍경이네요.

개인주의 시대가 되니 다들 그런 강제적인 인간관계에 진저리를 치며 탈출했죠. 열쇠 맡아주고 과자 나눠주는 정도는 괜찮아도, 왜 셋째 애는 낳지 않느냐고 물으면 이제는 간섭으로 느껴지잖아요. “그런 얘기하지 맙시다”하고 얼굴 붉히며 얘기하는 것도 귀찮으니까, 이제는 아예 관계를 맺지 않는 거죠. 대신 이제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소속감을 충족시키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동네에서 얻을 수 있었던 무언가를 온라인 커뮤니티가 똑같이 제공해 주지는 못해요. 

그게 뭔가요?

바로 책임감이 따르는 소속감인데요. 우리가 친한 친구에게는 모두들 책임감을 느끼잖아요. 친한 친구가 아프면 병문안을 가고, 갑자기 쓰러지면 그 집 식구들을 위해 기꺼이 뭐라도 해주고. 마찬가지로 동네에서도 옆집 이웃과 한 동네 사람으로 묶이게 되면, 원하든 원치 않든 같은 동네에서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겨야 해요.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싶은 사람들에 대해서도요. 그런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이 무겁고 싫어서 현대인들은 이를 회피하고 있지만, 저는 그게 그렇게 버릴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앞서 말씀드렸던 좋은 삶을 사는 데에는 이런 책임감도 분명히 필요하거든요.

이웃에 대한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게 조금 생소하게 느껴지는데요.

저는 사람다움을 생각할 때 그런 책임감을 막연히 생각하게 돼요. 어느 집에서 8살짜리 애를 굶겨서 애가 죽을 때 30kg이었다는 이런 아동 학대 기사를 보면 다들 울컥하잖아요. 저는 그때 ‘그 옆집 사람은 뭐했을까?’ 싶더라고요. 건강에 이상이 있을 정도로 왜소하다는 걸 오가며 몇 번쯤은 봤을 테고, 가끔 학대하는 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런 걸 외면하는 삶이 과연 좋은 삶일까요? 원치 않아도 그 애를 학대로부터 구출해야 하는 책임이 있어야 해요. 그런 책임은 그 집과 친한 관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옆에 있기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이런 책임감을 나눠 갖고 수행할 때, 좋은 삶을 살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런 책임감을 강제로 부여하는 커뮤니티가 필요하다고도 생각하고요.

그렇게 서로 책임감을 나누는 커뮤니티가 흔치는 않을 것 같아요.

그런 곳을 공동체라고 부르는데요. 지금 한국에는 공동체가 별로 없어요. 전 세계 선진국도 다 비슷하고요. 속해 있는 공동체를 얘기해 보라 하면, 보통은 가족, 그 다음엔 국가, 회사, 학교 정도를 얘기해요. 그런데 사실 이 중에서 가족 말고는 공동체 역할을 하지 않아요. 회사는 월급 주니까 다니는 거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금방 퇴사할 수 있어요. 학교도 대학 문화가 이상하다면 언제든 떠날 수 있고요. 국가 같은 경우는 상상의 공동체라고 얘기하는데, 실제로 사람들이 국가에 대한 책임을 의식하면서 생활하진 않죠. 

앞서 얘기한 온라인 커뮤니티도 마찬가지예요. 커뮤니티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해도, 이유를 설명할 필요도 없이 너무 쉽게 탈퇴할 수 있어요. 그 안에서 누구랑 싸웠든, 그 커뮤니티가 이상한 방향으로 나가든,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요. 커뮤니티에 환멸을 느꼈다면 탈퇴 버튼만 누르면 돼요.

오늘날 우리 주변에 가족 말고도 그런 공동체 역할을 할 수 있는 커뮤니티가 있을까요?

저는 여전히 동네가 강한 책임감을 부여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믿어요. 동네는 다른 커뮤니티와는 다르게 사람들이 쉽게 벗어날 수 없는데다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책임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죠. 가족이나 국가, 회사만을 본인이 소속된 공동체라고 생각하면 길에서 담배 피우는 고등학생을 만나도 제지할 이유가 없어져요. ‘가족도 아닌데 무슨 상관이세요’ 하고 말겠죠. 또 국가에만 책임이 있다면 국가가 처벌할 일이지, 지나가는 사람이 막을 필요가 없기도 하고요. 그래서 이웃끼리 서로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는 게 중요한 거예요.

활기를 되찾은 동네, 서로 의지하는 공간으로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같은 동네의 이웃에게 책임감을 느끼는 순간들이 필요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동네는 스쳐 지나가는 배경처럼 희미해져만 간다. 클릭 몇 번으로 모든 게 집 앞까지 빠르게 배달되는 시대, 문밖 발걸음은 점점 뜸해지고 동네에서 이웃들을 마주할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한때 따뜻한 인사와 웃음이 오가던 골목길은 고요해졌다.

배달앱이나 주문 키오스크 같은 서비스들이 나오면서 사람들을 마주할 일이 많이 줄고 있어요.

자본주의 아래에서 사용자의 효용을 극대화하는 다양한 서비스들이 나오고 있죠. 자본주의가 되게 좋은 제도지만, 좋은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부족한 게 있다고 생각해요. 자본주의의 기본 가정은 합리적인 선택을 내려서 효용을 최대화하면 그게 곧 최선의 삶, 좋은 삶이라는 거잖아요. 저도 그렇게 하고 가게 주인도 그렇게 하면, 각자 최대 효용을 높이게 될 테니 좋은 세상이 될 거라고요. 

확실히 이전보다 생활 자체는 더 편리해진 거 같아요.

그 효용을 부정하진 않아요. 10,000원에 사야 하는 물건을 밖으로 나갈 필요 없이 온라인 쇼핑으로 9,800원에 산다면 200원만큼의 효용이 높아지겠죠. 그런데 밖으로 나가서 물건을 살 때, 숫자로는 계산에 포함되지 않은 다양한 가치들도 있을 거예요. 인간관계나 책임감, 동네 사람들과 웃으면서 교류할 때의 만족감 같은 추상적인 가치들을 자본주의 시스템에 반영하기가 많이 어려워요. 그런데 이런 가치들의 효용도 꽤 크다고 생각해요. 

그런 만족감을 체감하기가 어려우니까 당장 편리한 서비스들만 이용하게 되더라고요.

만약 극단적으로 경제적 효용만 추구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해 봐요. 동네에 있는 도매상, 소매상 사장님이 가게 문을 닫고 온라인 커머스 대기업의 배송 물류 센터로 가게 되겠죠. 그분들이 물류센터로 가면 그분들한테나 소비자인 저한테나 효용이 극대화될 거예요. 그러다가 외국에서 더 저렴한 커머스 기업이 나타나면 이제 또 국내 기업은 망하고 모든 직원이 거기로 옮기게 되겠죠. 저는 최저가로 물건을 구매하며 바깥을 나가지 않고, 매일 아침 사장님은 죽상을 짓고 센터로 출근하시겠죠. 계산상으로는 효용이 더 높아지는데 그게 과연 좋은 삶인가 생각하면 아닌 거예요. 

정부나 지자체 단위에서도 발길이 끊긴 동네 커뮤니티를 다시 살리려고 노력하잖아요.

맞아요. 그런데 커뮤니티에 매력적인 요소를 더하기만 하면 좋은 커뮤니티가 지속될 거라고 착각하는 거 같기도 해요. 예를 들어 재래시장에 재밌는 가게들이 들어오면 매력적인 커뮤니티가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하죠. 몇 년 후 지원금이 끊겨 그 가게들이 시장을 떠나면, 그 가게를 보러 왔던 사람들도 더 이상 그곳을 찾지 않아요. 그동안 그 시장 안에서 커뮤니티가 형성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거예요. 

그렇게 노력했는데 사실은 커뮤니티가 형성된 적이 없었다는 게 되게 아이러니하네요.

저는 지역마다 있는 공공도서관이 커뮤니티 빌딩이라는 역할을 맡아줬으면 해요. 도서관은 딱 그 지역에 있고 이사할 수 없어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그대로 있을 거예요. 또 도서관은 모두에게 개방된 곳이라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찾을 수도 있죠. 아이들이나 어머니, 노인분들도 모일 수 있는 공간을 생각해 보면 없잖아요. 경로당이나 주민센터를 아무리 매력적으로 만든다고 해도 아이들이 가지는 않을 거예요. 예컨대 젊은 예술가들과의 협업으로 도서관을 더 재미있는 공간으로 만들면, 사람들이 도서관을 편하게 놀러 갈 수 있는 재밌는 공간으로 느끼게 된다면 좋겠어요.

사람들은 본인과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할 거 같은데, 다른 연령대의 사람들과도 모여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서로 책임감을 나눠 갖게 된다면, 내가 그런 처지가 됐을 때 다른 사람들도 나를 지지해 주겠다는 믿음이 생겨요. 지역 사회의 노인분들 신경 쓰지 않고 산다면, 당장은 좋다고 해도 ‘나중에 내가 노인 되면 어떡하지', ‘나는 내가 지켜야지' 이런 생각을 갖게 되겠죠. 그런데 연금 계좌가 나를 지킨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지역사회에서 사람들이 서로를 지켜주리라고 믿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확실히 그런 커뮤니티에서 오는 안정감은 상상만으로도 큰 위로가 되네요.

그렇죠. 그런 커뮤니티에는 늙은 사람도 있고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쉽게 인간관계를 끊을 수 없어요. 나이나 성별이 다르다고, 경제적 여건이 안 좋아졌다고, 장애를 가지게 됐다고 해도, 그런 걸로 내쫓지 않는 커뮤니티가 필요해요.

이렇게 동네 커뮤니티의 중요성을 고민하시게 된 이후로, 작가님의 일상에서 달라진 부분도 있나요?

사소하게는 이웃분들과 인사를 자주 하게 됐어요. 특히 제가 사는 아파트 단지에 중국 동포분들이 많으신데, 한국인들과 마주치면 조금씩 눈치를 보시더라고요. 특히 젊은 어머니들 같은 경우에 더 그렇고요. 그런데 제가 엘리베이터에서 인사하면 긴장을 많이 푸시는 거 같아요. 또 요즘 아이들이 지나가는 사람한테 인사하도록 교육받은 경우가 많은데, 아이들이 인사하면 꼭 잘 받아줘요. 반려견 데리고 산책하시는 분들도 다른 사람들이 개를 싫어할까봐 걱정하시는 분들도 많은데, 개한테 인사 건네면 되게 좋아하시더라고요. 또 제가 속한 여러 공동체에 대해서도 신실한 마음가짐을 가지게 됐어요. 좋은 삶에 필요한 깊은 인간관계를 다른 말로 하면 신실한 인간관계라고도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서로 믿음을 갖고 성실해야 하는 거죠. 

장강명 작가는 에세이 『아무튼 현수동』에서 이런 문장을 남겼다. “‘자기 동네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삶도 사랑한다’는 말을 이렇게도 확장할 수 있을까. ‘자기 동네를 사랑스럽게 만드는 사람은 자기 삶도 가꾸는 중이다'라고.” 동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살고 싶은 동네에 대한 상상은 그의 일상을 변화시켰다. 

변화한 그의 일상은 우리가 잊고 살았던 공동체의 가치를 일깨우며, 동네에서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품어보게 한다. 현관을 나서며 마주친 이웃에게 건네는 가벼운 눈인사, 기회가 생겼을 때 기꺼이 주고받는 작은 도움의 손길. 이런 사소한 행동들이 쌓인다면 동네는 언젠가 다양한 이웃들이 서로에게 의지할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다. 그런 동네에서 이웃들과 함께 좋은 삶을 가꿔나가는 모습을 한번 눈을 감고 상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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